노회설립 100주년 기념 종교개혁지 순례 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노회설립 100주년 기념 종교개혁지 순례를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평서노회의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38명이 9박 11일의 일정(2023년 7월 3일~7월 13일)으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의 도시들을 다니면서 후스, 루터, 츠빙글리, 칼뱅, 등의 흔적을 살펴 보았습니다.

 

단지 견문을 넓히려는 여행이 아닌 역사의 흔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바로 세우고자 자신의 생명을 걸고 헌신했던 믿음의 선배들을 만나고 그들이 걸었던 길을 함께 걷고자 하는 결단의 순례였습니다. 어떻게 믿음의 선배들이 암흑과도 같은 그 시대에 개혁의 불을 켜고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우고 교회를 참되게 세우고자 몸부림쳤는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던 개혁자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그 시대를 향하여 타협하지 않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순종을 걸어갔던 그 용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들이 이렇게 전승 되어 우리에게, 나에게 왔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순간 순간 떨림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라는 탄식도 터져 나왔습니다.

내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가 무엇을 말하여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종교개혁 현장을 살피며 제가 담아온 사진들을 올려 드립니다.

현장을 밟는 감동까지는 아니겠지만 같은 은혜와 기쁨과 감동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종교개혁의 선구자 얀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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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의 동상입니다.

 

얀 후스는 그의 순교일인 7월 6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는 체코의 영웅이다. 얀 후스의 동상에는 승리를 거둔 후스파 전사들과 가톨릭에 의해 추방당하는 신자들, 그리고 체코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젊은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얀 후스의 사상을 요약하면 첫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둘째, 성직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성직매매를 금지한다, 넷째, 성경이 신앙과 행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후스는 사제들만 받았던 성만찬의 잔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주는 이종배찬을 행하였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성만찬 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떡과 함께 잔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모든 이가 성만찬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됨을 이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후스파 사람들은 방패와 깃발에 성만찬의 잔을 로고로 새겨넣었다. 

뿐만 아니라 후스는 성도들이 거룩한 진리에 따라 살기로 결단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부르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때문에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코어로 설교 하였고, 체코 사람들의 정서에 잘 맞는 찬송 가사를 지어서 대중적인 찬송도 보급하였다. 교회 내부의 조각상들을 제거하고 대신 벽면에 십계명과 찬송가 가사를 설치하였는데 이와 같은 모습은 그가 사역 하였던 베들레헴 교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로 인해 후스는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자로 규정되어 파문을 당하고 모든 설교와 교육을 금지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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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교회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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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년에 후스파는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뉘어진다. 온건파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귀족들과 프라하 대학이 주도하였고, 과격파는 프라하의 신도시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과격파는 얀 지스카를 중심으로 오로지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면서 기존의 교회의 예전과 교리를 완전히 걷어 치웠고, 성직자 제도와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며 과격한 종말론을 선호하였다. 그리고하여 그들은 산으로 결집하였는데 이 산을 다볼산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거점도시 이름이 현재의 '타보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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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스카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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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얀 지스카 장군 / 우 후스박물관)

 

애꾸눈 얀 지스카는 체코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카톨릭교회가 일으킨 후스전쟁에서 정식 훈련도 받지 못한 농민들을 데리고도 매번 승리를 했다. 

타보르의 도심 한 가운데에는 지스카 광장이 있다. 광장 왼편에는 후스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에는 후스파가 어떻게 로마카톨릭 군대에 맞서 싸웠는지, 지스카 장군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쟁 때에 어떤 무기와 전술을 사용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는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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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청사 탑 외벽에 설치된 천문시계이다. 매시 정각이 되면 시계 위에 있는 양쪽 문이 열리면서 12사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구시청사 옆 바닥에는 처형당한 개신교 지도자 27명을 기리는 십자가와 그 날짜가 표시되어 있다. 

 

 

2.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_1546년 2월 18일)

 

독일은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나라 중 하나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나 가톨릭과 개신교의 30년 전쟁(1618-48)으로 전 국토의 3분의 1이 초토화 되기도 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아이스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공부하여 학사 및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505년 7월 2일 슈토체른하임에서 벼락을 만났고, 두려움 속에서 구원 받을 준비가 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 후 자신을 살려면 준다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하였다. 그후 아우수스티누스파 수도원에 들어갔고, 1507년 2월 27일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10년에서 1511년 사이에 루터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지만 그가 로마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오히려 그에게 영적 고민에 빠지게 하였다. 1511년 가을 비텐베르크로 가서 성경을 연구하여 1512년 10월 19일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성경학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게시함으로 본격적인 종교 개혁을 발화시켰다. 이후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신학에 반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아우그스부르크, 라이프치히에서 계속 논쟁을 벌였다. 결국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6월 15일 루터의 파문을 경고하는 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루터는 이 교서를 비텐베르크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림으로써 로마가톨릭교회와 완전히 결별 하였다. 1521년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의회에 소환 당하였지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루터는 교회와, 정치권력과도 등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하였고 이곳에서 약 10개월 동안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 일은 종교개혁운동이 확산되는데 엄청난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평신도들은 읽지 못하고 사제들이 가르쳐 주는대로만 따랐는데 이제는 개개인이 직접 읽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겉으로 드러난 부패를 공격하기보다 그 내부의 잘못된 신학의 핵심을 공격하는 것에서 95개 조항을 게시하였고, 이것이 종교개혁을 점화시키는 불꽃이 되었다. 루터는 '죄인인 내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발견한 답은 인간이 선한 행위나 면죄부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라는 것이었다.

또한 루터는 만인제사장 교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존중하도록 하였다. 사제만이 제사장이고 평신도들은 사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달리,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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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에 있는 종교개혁기념 동상

 

 

 

아이슬레벤 (루터의 생가, 세례받은 교회, 루터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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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측에 보이는 탑이 보이는 교회가 루터가 세례를 받은 성 베드로-바울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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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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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스교회(St. Andreaskirche)와 교회 내부 벽면에 있는 초상화(위 루터의 아버지, 어머니 / 아래 루터, 그의 아내)

성 안드레아스 교회는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를 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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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레벤의 성 안드레아스 교회

 

성 베드로-바울 교회는 루터의 생가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회로서 그가 세례를 받은 곳이다. 현재의 모습은 리모델링이 된 모습으로 강단 좌측에는 세례대가 있으며, 중앙에는 성찬대, 우측에는 설교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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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임종한 집

 

용골 모양 아치로 테를 두른 의자가 딸린 현관이 파사드를 장식하고 있다.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다음을 기약(?)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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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광장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설교했던 시립교회, 박물관이 된 그의 집, 비텐베르크 대학, 루터의 참나무 등, 너무나도 많은 루터의 삶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 곳으로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이다.

 

비텐베르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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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성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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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 우 루터가 설교했던 설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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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성 부속교회, 좌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기록 되어져 있는 교회 첨탑 / 우 루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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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대학

 

비텐베르크 대학은 프리드리히가 재산을 털어 세운 대학이다. 루터는 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을 형성해 나갔다.

 

루터 하우스

 

루터하우스는 프리드리히 영주가 1502년에 세운 건물이다. 루터가 처음 방문한 1508년 당시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이었으며 루터 자신도 수도사의 자격으로 이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프리드리히는 수도원을 폐쇄하고 1526년 이 건물을 루터에게 넘겨주었다. 이 후 이 집은 종교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으며, 루터와 카타리나, 그리고 여섯 자녀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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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나의 문

카타리나는 남편 루터의 57세의 생일을 맞이하여 이 문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일명 '카타리나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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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부인 폰 보라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개혁적인 신앙을 가진 수사와 수녀들이 뛰쳐 나오게 나왔다. 그러던 중 루터의 도움으로 수녀들이 생선을 나르는 마차에 몸을 숨긴 채 비텐베르크로 피신을 왔다. 탈출한 12명 중 3명은 집으로 가고 9명은 결혼을 하기 원했다.  하지만 그 중에 한 수녀만이 2년이 넘도록 남편을 얻지 못했다. 그녀가 바로 카타리나 폰 보라이다. 바로 이 폰 보라와 루터는 1525년에 도시교회에서 개신교 최초의 목사인 부겐하겐의 주례로 결혼식을 했고, 그로써 프로테스탄트 성직자 가정의 원형을 제시하였다. 루터는 처음에는 단지 의무감으로 결혼했을 뿐이었지만 결혼한 뒤에는 아내를 '여주인'이라고 부르면서 극진히 사랑했으며 6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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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와 관련된 저작물                                                      십계명 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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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 파문 위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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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난로                                                      인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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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와 아내 폰 보라                                                      루터가 지은 찬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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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임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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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참나무 (루터의 집 건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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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는 루터가 60일 이내로 그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을 선고하겠다는 교서가 작성 되었고 에크(Johann Eck)는 이 교서를 독일로 가져가서 배포를 하였다. 그러나 에크는 가톨릭의 수도원과 성당에서는 환대를 받았지만 그 밖의 곳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 일이 있기전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와 함께 자신의 저술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보냈다. 하지만 교황은 루터의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서 루터는 같은 방식으로 교황에게 되돌려 주고자 하였다. 아침 일찍 학생들을 모은 루터는 이곳에서 스콜라 철학의 문서들을 쌓은 뒤에 불을 붙이고 교황의 파문 교서를 불길 속에 던져 버렸다.

이 참나무는 바로 그 장소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300주년 기념으로 1830년에 심겨진 것이다.

 

 

Melanchthon House

 

필립 멜란히톤은 루터의 동료였다. 루터는 사제였지만 멜란히톤은 평신도 신학자였다. 그의 어린시절 그의 외할머니의 형제인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로이힐린에게 영향을 받았고, 하이델베르크와 튀빙겐에서 공부했다. 그 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로 옮겨가면서 루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동역자가 되었다. 그는 1521년 루터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 최초의 조직신학 책인 [신학총론]을 출판했으며, 루터주의 신앙고백을 체계화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다. 루터와 언제나 함께 한 두 사람은 죽어서도 비텐베르크 성 교회당 안에 나란히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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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에르푸르트)

 

1505년 7월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와 자신의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부단히 씨름하였다. 그는 엄격한 규칙 속에서 훈련을 받았고, 자신이 구원 받는 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고행이라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심이 그를 불과 2년이 못 되어 사제 서품을 받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이러한 경건생활, 즉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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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학창시절이 담겨 있는 아이제나흐

 

아이제나흐는 루터에게 마음에 교향과 같은 곳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였고, 보름스 제국의회로 소환되어 가는 길에,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들러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1521-1522년까지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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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성가대 소년으로 노래를 불렀고, 바흐가 세례를 받았던 성 게오르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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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하우스

(루터가 학창시절을 보낸 루터하우스는 1631년 화재 때 소실 되었다가 다시 복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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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게오르크 교회 안에 있는 바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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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사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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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생가

 

 

바르트부르크 성

 

보름스에서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지 않은 루터에게 황제 카를 5세의 보름스 칙령이 내려지므로 인해 루터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때 프리드리히는 은밀하게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 안에 루터를 숨겨 주었다. 이 성 안에서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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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부르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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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창문이 있는 작은 방이 루터가 성경 연구와 성경 번역에 매달렸던 방이다.

 

보름스

 

교황에 의해 파문된 루터는 황제에 의해 제국의회의 청문회에 소환되었다. 1521년 4월 17일 루터는 제국의회에 출두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현장이 바로 보름스이다. 루터는 주변에서 말리는 만류를 '마귀가 기왓장 같이 많아도 나는 간다.'라는 결연한 의지로 뿌리치고 재판정에 섰다. 이 재판 후에 루터는 피신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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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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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 조형물

 

루터 동상의 오른팔 쪽 하단 왼쪽에는 피렌체의 설교자 사보나 롤라가 있다. 오른 손을 위로 향하고 있다.

왼쪽 하단에는 체코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가 있는 십자가를 들고 있다.

뒷편에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배포했던 상인 피터 왈도가 성경책을 펼쳐 들고 있다.

뒷편 왼쪽엔 성경을 영어로 최초로 본역한 존 위클리프가 커다란 성경을 펼쳐 들고 있다.

이 모든 동상들은 종교개혁운동이 루터 한 개인이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던 이들의 개혁을 발판 삼아 진행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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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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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틴 루터                                                      사보나롤라(1452-1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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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스                                                      필립 멜랑히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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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하네스 로이힐린(우측)과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를 상징하는 여인상                       슬픔의 마그데부르크  ↗

 

2. 칼뱅 (John Calvin, 1509~1564)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 누아용에서 태어나 파리, 오를레앙, 부르주에서 수학하였고, 1533년경에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 회심했다. 1534년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그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바젤에 머문다. 거기서 칼뱅은 고국의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였다. 약관 26세에 그 방대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저술한 그의 역작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 후 우연히 들른 제네바에서 기욤 파렐을 만나면서 운명의 도시인 제네바의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칼뱅과 그의 동료들은 제네바의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 전체가 복음에 합당한 도시가 되도록 개혁했다. 

그러나 칼뱅의 개혁 추진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1536년 제네바로 초청되었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추방 당했다. 이때 그는 스트라스부르로 가 프랑스 피난민들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러나 1541년 그는 제네바 교회의 간청으로 다시 돌아가 1564년 죽을 때까지 제네바의 목회자로,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교육자로, 신학자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감당했다. 그의 제네바 개혁은 교회의 무질서와 시의 도적적 타락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였다. 먼저 그는 교회 조직을 초대 교회의 모델을 따라 정비하고 교회 법규를 제정하여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칼뱅은 제네바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교육을 통한 개혁을 주장했다. 제네바 아카데미가 그 유명한 16세기 종교개혁의 산실이었다. 

 

 

스트라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에는 마르틴 부처의 목회지 성 토마스 교회,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뱅이 3년 동안 머물며 목회한 방패교회, 요하네스 슈투름이 세운 스트라스부르아카데미 등이 있다. 스트라스부르는 칼뱅에게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다.  프랑스 알자스 지장의 이 아름다운 도시는 지리적으로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가톨릭의 박해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가까운 국경지대였다. 이들을 대상으로 칼뱅은 피난민들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기독교 강요] 개정판과 [로마서주석]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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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이 목회하였던 피난민들의 교회와 그가 거닐었을 스트라스부르의 쁘띠 프랑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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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 구텐베르크 동상

 

종교개혁을 유럽에서 촉진시켰던 촉매제의 역할을 한 건 바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의 발명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쇄술을 '하나님의 기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서 길에 만나는 구텐베르크의 동상을 보면 그가 새로 개발한 인쇄기로 인쇄한 성경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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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틴 부처의 목회지 성 토마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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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예배의식의 원조격인 교회로 마르틴 부처가 목회했던 교회이다. 설교단 대신 강대상이 앞에 있고 그위에 성경이 펼쳐져 있다. 옆에는 성찬대가 있어 말씀과 성례를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의 예전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모차르트와 슈바이츠가 연주했다는 오르간이 있다.

 

제네바

 

제네바는 칼뱅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칼뱅이 목회했던 생 피에르 교회, 칼뱅이 살았던 사택, 칼뱅의 무덤, 종교 개혁자들의 기념조형물, 제네바 아카데미, 세르베투스가 화형당한 샹펠, 등이 있다. 또한 제네바는 '개신교의 로마'라는 별명까지 있는데 이는 제네바로부터 유럽 전역으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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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피에르 교회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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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 칼뱅이 설교 하였던 설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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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의자(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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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피에르 교회와 칼뱅의 강당(Auditoire de Calvin)

칼뱅의 강당에서는 16세기 중엽에 종교개혁자들, 신교도들, 망명자들이 모여 자국어로 예배하며 가르치고 기도하던 곳으로 칼뱅, 존 낙스, 테오도르 드 베즈 등이 이곳에서 가르쳤다.특히 존 낙스는 이곳에 목회하면서 스위스 종교개혁을 배우기도 하였기에 '녹스 채플'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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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 시청사와 장자크 루소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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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 있는 종교개혁자 기념 조형물 앞에서 단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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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빙글리를 기념하는 돌과 루터를 기념하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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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5월 21일은 제네바 시의회 총회 결정에 따라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사를 없애고, 하나님의 복음의 거룩한 규칙과 말씀을 따라 살기로 한 해로서 제네바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날짜이다. 1602년 12월 12일은 사보이 공작의 공격으로부터 제네바를 보호하고 독립을 지킨 날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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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하숙집과 그가 공부하였던 콜레주 드 몽테규

 

칼뱅은 지붕 밑의 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취임 연설문 사건 이후 침대 시트를 이용해서 창문을 타고 내려와 파리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몽테규 외벽에는 이 학교에서 공부한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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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건물이 예전 콜레주 드 몽테규이며 가운데 건물이 프랑스 위인들이 묻혀 있는 팡테옹, 왼쪽 건물이 칼뱅의 하숙집이 있던 프르테 대학의 옛 건물

 

 

칼뱅은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므로 자신의 장례식에서 일체의 허식을 행하지 말고 무덤에 어떤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에 제네바 시민들은 유언에 따라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어떤 예식도, 설교도, 찬송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후를 알 수가 없다. 현재의 칼뱅의 무덤은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1999년 현재 모습으로 단장했다고.... 칼뱅의 유언을 어기고 무덤을 조성한 데 항의해 고소가 되었는데 '고인의 유언을 어기는 것이 법적 저촉을 받는 것인지는 판례가 없기에 앞으로 계속 연구해보겠다'는 애매한 판결로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칼뱅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을 확립한 신학자이다.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에 대해서, 교회를 지키고 성도를 세우는 권징에 대해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이루어지는 사중직제에 대해서,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표준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학교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운동을 벌였다. 

참고) 현지 가이드 해설, and 종교개혁 그 현장을 가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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